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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사

by 플러스토리 2023.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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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과 백향목 혁명

1975년 레바논의 기독교 일파인 마론파는 레바논 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세력을 확대하자 불안감을 느끼고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이슬람교 좌익연합과 기독교 우익 군부세력의 충돌로 레바논 내전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개입으로 이어졌습니다.

 

레바논 땅에서 사실상 대리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후 30년 가까이 레바논은 사실상 시리아의 점령 하에 처했습니다.

 

 

 

이는 2004년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으로 끝이 났습니다.

 

‘백향목 혁명’은 시리아 사주를 받은 괴한들이 탈시리아 노선을 추진했던 라피크 하리리 전(前) 총리를 암살하자 국민들이 분노해서 촉발됐습니다.

 

혁명 뒤 2년여에 걸쳐 시리아 군은 레바논에서 철수했습니다.

 

 

 

이집트 · 이스라엘 평화협정

1978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왼쪽), 미국 카터 대통령(중앙), 이스라엘 베긴 총리(오른쪽)가 평화협정 체결 후 환하게 웃고 있다.

1977년에는 이집트의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점점 밀착되더니 마침내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의 의회에서 연설했습니다.

 

아랍권 전역에선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에 거센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듬해 사다트-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지미 카터가 미국 캠프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손을 잡았습니다.

 

베긴 총리와 사다트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뒤 1979년 이집트 · 이스라엘이 마침내 평화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1981년 사다트가 이집트 군부 내 이슬람교 과격파에 암살되었습니다.

 

 

 

한편, 1982년 레바논 남부 시아파 이슬람 무장조직 헤즈볼라가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병사를 납치하자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침공했습니다.

 

이 틈에 레바논의 악명 높은 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는 이스라엘 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샤브라-사틸라 난민촌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하마스 창설,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

1967년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구

1988년 가자지구에 이슬람저항운동, ‘하마스’가 창설됐습니다.

 

팔레스타인국민협의회(PNC)는 이 해 11월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25개국이 팔 망명정부를 승인했습니다.

 

아라파트는 유엔총회 제네바 특별회의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결의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들이 블레셋이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원어는 그리스 말로 팔라이스티네입니다.

 

에게 해 지역 팔라이스티네 출신 사람들이 바다 건너와서 정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곳을 전통적으로 유대로 불렀습니다.

 

그 후에는 로마인이 지배하게 되는데, 이들은 132~135년의 유대 반란을 진압한 뒤 유대인의 흔적을 말살하려고 이 지방의 이름인 유대를 지우고 시리아 팔라이스티나(Syria Palaestina)라는 라틴어 지명을 붙였습니다.

 

7세기의 새로운 점령자 아랍인은 이곳을 필라스틴(방언은 팔라스틴)으로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마드리드 중동평화협정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PLO 아라파트 의장이 백악관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원칙선언 성사 후 악수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그들의 대(對) 이스라엘 게릴라 조직을 관장하기 위해 1964년 PLO를 설치한 이후 더욱 군사적으로 대립한 양측은 1991년 미국의 주선으로 마드리드 중동평화협정을 열어 직접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 회담은 유엔 결의안 제232조의 ‘땅과 평화의 교환’ 원칙을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 유엔 결의안은 이스라엘이 점령지를 팔레스타인 · 시리아 · 요르단에 돌려주는 대신 아랍권이 이스라엘의 실체를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양측은 2년간 열 차례에 걸쳐 회담을 거듭하다가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 총리 라빈과 PLO 의장인 아라파트가 미국 백악관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중동평화에 역사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같은 해 이-팔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어 오늘날까지 중동평화 구상의 결정체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듬해에는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탄생해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은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점점 줄어드는 팔레스타인 영토

1994년 PLO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부총리였던 시몬 페레스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습니다.

 

오슬로 협정에 이은 오슬로 II 협정이 이듬해 체결됐지만, 라빈은 유대극우파 카흐네차이 조직에 속한 이갈 아미르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격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사이 이스라엘은 박격포를 공격하는 게릴라 단체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가자지구 등지에서 수년에 걸쳐 팔레스타인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2004년 아라파트가 사망하자 마흐무드 압바스가 팔레스타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이스라엘 군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했지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와 탄압은 계속되었습니다.

 

 

 

평화를 갈구하는 이-팔 국민들

2007년 11월 27일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회담에서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오른쪽)이 부시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의 총선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의 73퍼센트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85퍼센트는 평화협상을 지지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이스라엘인 48퍼센트도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정부와 대화를 해야 한다며 공존을 요구했습니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두 나라의 국민들은 평화를 갈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

2008년 12월 28일,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했습니다.

 

명분은 팔레스타인 측의 로켓포 공격을 중단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달 1월 3일에는 이스라엘 지상군이 가자를 침공해 가자지구 유엔본부까지 공격했습니다.

 

2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이미 1990년대 한 차례 총리를 지낸 우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했습니다.

 

 

 

2010년 2월 이스라엘은 두바이에서 하마스 지도자를 표적 암살하고 5월에는 가자로 가는 구호선박을 공격해 9명을 사살했습니다.

 

2012년 11월에는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에 대응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민간인 살상으로 다시 유혈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강경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간의 공격행위와 보복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와 증오는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어제의 적과 곧바로 손을 잡을 수 없다는 한계를 알기 때문에 유엔은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중재하고 있습니다.

 

친이슬람 계와 친기독교계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들을 반대하는 중동최대 테러조직 헤즈볼라의 갈등으로 혼돈 속에 있는 레바논은 수많은 민간인들이 이해관계의 폭력 아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교조주의는 인류의 적이다

2012년 가자 공습 당시 세계적인 학자이자 유대인인 노엄 촘스키가 일갈했습니다.

 

“해군도, 공군도, 방공망도, 중화기도 없는 주민들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살육”일뿐입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비판하고 나설 정도로 현재 이스라엘은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자지구의 하마스에게 최대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의 파타 정부만을 협상대상으로 인정하고, 무장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하마스 정부는 테러집단으로 규정해 공격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전 같으면 주위의 이집트나 시리아 그리고 이라크가 개입해 조기에 휴전이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리아와 이라크는 국내의 이적단체(ISIS)와의 내전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끼어들 여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하마스를 잠정적인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중재에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인정한다는 입장으로 유엔 안보리에서조차 친이스라엘 일변도입니다.

 

유엔조차 평화를 호소하는 반기문 총장의 말뿐인 호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궁지에 몰린 하마스를 이스라엘은 더욱 몰아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2014년 어린이 납치 살해로 촉발된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분쟁 곧 가자지구 공습은 수많은 민간인 살상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마스의 군사시설이 민간인시설에 설치되어 있어 부득이한 공격이었다는 그들의 변명이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의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공습을 멈추기는커녕 지상군까지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유대교 교조주의가 있습니다.

 

모든 교조주의의 특징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틀림으로 몰아 죽음으로 징계하려 합니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종교적 원리주의가 발흥하면 그 역사는 틀림없이 망하거나 쇠퇴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집권 세력이 광신적인 시오니스트들입니다.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맺었던 이스라엘 온건파 수상 라빈이 1995년에 암살당한 이유입니다.

 

 

 

시오니즘과 유다이즘은 엄격히 구분됩니다.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며 이를 위해 폭력을 서슴지 않습니다.

 

반면, 유다이즘은 평소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성경》과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 고유의 사상입니다.

 

팔레스타인을 인정치 않으려는 극단적 시오니즘을 유대인 진보파는 물론 정통파들조차 반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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